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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리석기념관 > 장리석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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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1950년대

1910

1916 음력 4월 8일

평안남도 평양시 경제리(京里) 149번지에서 치과의사 장수현(張洙賢)과 안인화(安仁花) 여사 사이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18

당시 한국최초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창설되어 망국의 설움 속에서도 화가들이 결속을 이루고 미술인들의 자각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주어진다. 이에 대응해 일제는 1921년 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를 창설하여 관전 중심의 미술 정책을 주도하였고 1944년 제24회전까지 개최했다.

1920

1921 5세

부친이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26 10세

모친마저 사망한 후 맏형 원석(元錫), 둘째형 춘석(春錫)과 더불어 백부 장수범(張洙範) 댁에 기거하며 성장했다.

1930

1930 14세

숙부의 도움으로 상수보통학교(上需普通學校) 졸업했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취미로 그림을 그려 주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당시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돌아온 숙부인 장수천(張洙天)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1935

1918년 창설된 이래 15회까지 지속된 서화협회전이 일제 관헌들의 탄압으로 중지되었다.

1936 20세

최영림 황유엽 등과 교우를 맺었으며 평안남도 도청에 근무하는 박수근과 함께 ‘주호(珠壺)’그룹을 만들어 활동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당시 선배화가들로는 최연해 박영선 등이 있었다.

1938 22세

평안남도 주최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하여 회화에 대한 소질을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평생 화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당시 공모전의 최고상은 박수근이 수상 했다. 첫째 부인 전정실(田正實)과 결혼했다.

1939 23세

딸 수광과 1941년 아들 웅만이 태어났다. 훗날 6·25 전쟁 중 폭격과 더불어 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맏형으로부터 접하게 된다.

1940

1942 26세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듬해에 개최된 제22회, 마지막 행사인 제23회 선전에 세 차례 연속 입선함으로서 화단에 데뷔했다.

1945 29세

일제로부터 해방과 더불어 한국미술은 새로운 격동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군정하에서 벌어진 좌우익 충돌은 온갖 정치단체의 난립을 부채질 했다.
화단 역시 여러 미술단체가 이합집산을 이루어 창작활동은 마비된 채 하나의 혼란기 로 일관했다. 북측 미술인들은 좌익진영의 휘장 아래 놓이게 되었고 당시 평양에 거주하던 장리석은 평양미술동맹에 소속되었다.

1948 30세

2월 인민군이 창설되었다. 단독정부 수립과 미군철수 등을 주장하는 제주도의 공산주의자와 일부 주민들이 무장봉기하여 도내의 관공서와 경찰지서를 습격한 제주도 4·3사건이 발생한다. 미군정과 새 정부에 의한 진압과정에서 수만 명의 희생 자를 냈으며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참사로 기록됐다. 3년 후 장리석은 제주도에 입도하게 된다.

1949 33세

군정하의 해방공간에서 우익진영의 미술인은 자체결속을 위한 돌파구를 모색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정부는 9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를 창설했다.

1950

1950 34세

6·25 동란이 터지고 평양에 있던 장리석은 북한 노동성에서 건립 중이던 금강산호텔의 벽면 장식 작품제작에 동원되어 7월 말경 평양을 떠났다. 정착한 쌍계 사에는 장리석 외에도 최영림 한묵 김민구 유석준 등이 함께 있었으나 전쟁사태가 악화되면서 제작은 중단됐다. 북진한 국군의 해군사령부에 최영림과 더불어 문관으로 입대해 종군하게 되었다.

1951 35세

1·4 후퇴 시 국군의 원산철수와 함께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피난, 가족과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 1년 뒤 최영림은 마산으로 옮겨가고 장리석은 군의 해산에 따라 제대하여 제주도에 정착했다. 배급받은 식량으로 생계를 연명했다. 수채화 도구를 들고 해변과 시장을 헤매면서 해녀와 조랑말 등을 그렸다.
당시 월남 작가는 박고석 정규 황병수 김병기 이중섭 한묵 송혜수 윤중식 박수근 김흥수 장리석 최영림 함대정 등이 있었으며 이들의 일부는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월남 작가전을 개최하는 등 화단에 새로운 기운을 주입하는데 기여했다.
한편 제주에는 장리석 최영림 외에도 이중섭 홍종명 김창렬 등이 제주화단 형성에 기여했다.

1952 36세

제주도 피난생활 중, 북에서 피난 내려온 이소애(李小愛)와 재혼하여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맞이했다.

 

1952년 36세

1953 37세

9·28 수복 후 전체 미술인들은 서울의 국립극장에서 미술인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미술협회를 대한미술협회라 개칭, 혼란된 화단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1954 38세

3월. 제주에서의 4년간 체류생활을 접고 서울로 이주했다. 화가 손응성 이봉상 등과 교우를 맺었다. 가난으로 고생스런 생활이 지속되는 가운데 제3회 국전에서 입선했다.

1955 39세

제4회 국전에 〈조롱과 노인〉으로 첫 번째 특선을 수상했다. 이후 국전에서 세 차례의 특선과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으며 〈조롱과 노인〉은 그에게 첫 기쁨을 안겨 준 작품으로 평생 동안 작가가 소장했다.

1956 40세

제5회 국전에 〈소한〉으로 두 번째 특선을 수상했으며 미술가협회 창립위원으로 참가했다. 이 그룹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화가 개개인이 지닌 소양에 따라 현대적 정신을 추구한다는 목표아래 결성되었다. 1957년에서 63년까지 지속적으로 창작미술가협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1957 41세

제6회 국전에 제주의 해녀를 그린 기념비적 대작 〈해조음〉을 무감사로 출품했다.

1958 42세

제 7회 국전에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회는 전시회에 출품한 〈그늘의 노인〉과 〈복덕방 노인〉 두 작품 모두를 대상의 대상으로 천거하였고 그 중 〈그늘의 노인〉은 대통령상으로 결정되었다. 이 그림의 노인은 뒷집 영감님을 모델로 한 것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구석구석 파헤쳐 가면서 구수하고 소박하게 담아 가던 그의 꾸준한 미관이 올바르게 반영된 것이고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이웃과의 인간애에서 기념비적인 인간상을 끌어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59 43세

제8회 국전에서 세 번째 특선을 수상했으며 1956년 창설된 서라벌 예술대학 미술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대우교수로 재직했으며 후에 항상 자신은 직업이 교수가 아니고 화가, 아니 환쟁이로 살고 싶고 또한 그렇게 행세해 왔노라고 회고했다.